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카모리 아키나 (문단 편집) === 아티스트 노선으로 전환과 전성기 (1985년~1989년) === 1984년 11월에 출시한 열번째 싱글 '[[飾りじゃないのよ涙は|장식이 아니야 눈물은]]'부터 기존 아이돌 이미지의 가요나 발라드가 아닌 아티스트로서의 면모가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 싱글은 주간 차트 1위는 물론 연간 차트에서도 6위를 기록하며 대박을 쳤다. 이 즈음부터 남성팬보다 여성팬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는데, 패션리더로서의 매력이 부각되었고 노래가사와 이미지를 통해 당당한 일본 여성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이 후 1985년 1월에는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사랑 여행'이 개봉하였으며, 이 영화에 공동 주연으로 출연한 [[콘도 마사히코]]와 교제하기 시작한다.[* 일부 인터넷 설에는 1982년 아키나가 데뷔했을 때부터, 콘도가 아키나를 점찍어서 아무도 대쉬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기도 한다.] 콘도는 촬영 기간 동안 아키나에게 [[반지]]를 선물하거나 휴가에 초대해 함께 데려가는 등 적극적으로 애정공세를 했다고 한다. 이어 발표한 열한번째 싱글 '[[ミ・アモーレ〔Meu amor é・・・〕|미 아모레]]'[* 최초 발표했을 때 작사가는 '내 사랑'이라는 의도로 "Mi Amore"로 제목을 정하였으나, Mi는 스페인어, Amore는 이탈리아어였기 때문에 다소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어인 "Meu amor é"로 중간에 표기를 변경했으나 이번엔 뜻이 '내 사랑'이 아니어서 문제. 영어 외의 언어에 대해 무지했던 당시 일본 가요계 풍조를 볼 수 있는 사례로 꼽힌다.]는 아키나 최전성기의 시작을 알린 곡이다. 차트인과 동시에 1위를 기록하며 2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 1985년 연간 차트 2위 랭크 및 66만장[* 추후 발매한 원곡 [[赤い鳥逃げた|붉은 새가 도망쳤다]] 의 판매량까지 합하면 98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아키나 역대 두 번째로 높은 판매실적을 기록했으며, 무엇보다도 이 곡을 통해 최연소로 1985년 일본 레코드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리오의 이국적인 삼바 리듬과 정열적인 카니발의 이미지를 담은 이 곡은, 원래 '붉은 새가 도망쳤다' 라는 곡으로 작사되었으나 아키나가 "가사가 적극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재작사를 요청하여 편곡까지 더해 재탄생한 곡. "미 아모레"의 이국적 이미지는 다음 싱글인 아랍풍의 '[[SAND BEIGE -砂漠へ-]]'로 이어졌으며, 쓸쓸한 도시 여성의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풍기는 발라드 '[[SOLITUDE]]' 까지 지속적으로 차트 1위를 점령하게 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kakaotv(300761904, height=240)]}}}|| || '''대표곡 중 하나인 <[[DESIRE -情熱-|{{{#fff DESIRE -정열-}}}]]>''' || 1986년 2월에 발표된 "[[DESIRE -情熱-|DESIRE -정열-]]"은 그녀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대표곡. 싱글 재킷의 기모노도 화제였으며,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된 기모노와 보브 가발이 실제 무대 의상으로 사용되면서, 기존과는 완전히 달라진 아키나의 매력이 발산되었다.[* 그래서 팬들 중 일부는 이 시기 아키나의 음악과 비주얼을 역대 아키나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경우가 꽤 있는 편이다.] 실제로 아키나는 디렉터였던 후지카와에게 "TV 출연했을 때의 모습을 기대해 달라"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무슨 말인가 했던 후지카와는 실제로 아키나가 TV에 나온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지금 기준에서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세련된 패션 감각과 메이크업/가발, 투수의 투구 동작에서 본 딴, '난데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안무는 이 노래를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하다. 이 노래를 통해 나카모리 아키나는 1985년에 이어 일본 레코드 대상을 2연패하는 업적을 쌓았다. 이 기록은 여성 솔로 가수로서는 최초이며, 이후 [[아무로 나미에]], [[하마사키 아유미]][* 물론 [[하마사키 아유미]] 이 분은 최고 기록인 3연패까지 이뤘다. [[EXILE]]과 동률.]가 공동으로 가진 기록. 이어, "[[ジプシー・クイーン|집시 퀸]]"과 "[[Fin(노래)|Fin]]"등의 싱글을 내며 도시 여성적 이미지를 확고하게 다지는 등 전성기를 이어나갔으며, 그러한 와중에도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위해 앨범 [[不思議]](불가사의)를 발매. 본인이 직접 앨범 제작에 참여하여 아이돌 팝의 범주를 벗어나 뉴웨이브나 신스팝의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한편 가수 본인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트랙에 묻어버리는 프로듀싱을 선보여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키며 아티스트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위태로운 듯 치명적인 멜로디와 안무, 후렴구의 비브라토가 매우 인상적인 "[[TANGO NOIR]]", 무려 에르메스 손수건으로 무대의상을 제작하여 큰 화제가 된 번안곡 "[[BLONDE(노래)|BLONDE]]"[* 본인의 스튜디오 앨범 [[Cross My Palm]] 의 6번 트랙 를 재해석하여 싱글컷] 등 내놓는 싱글마다 주간차트 1위를 기록하는 등 인기열풍이 지속되었다. 또한 해외 작곡가만을 기용하여 모든 제목과 가사가 영어로 이루어진 [[Cross My Palm]]과 같은 팝 앨범을 발매하는 등 음악적 시도도 놓치지 않았으며, 앨범 발매 한 달 후 열 아홉번째 싱글 "[[難破船|난파선]]"을 발표하며 연간 차트 6위에 오르는 대박을 치게 된다.[* 이 곡은 원래 싱어송라이터인 카토 토키코가 1984년 발표한 곡이었으나, 카토 토키코 본인이 아키나의 목소리로 불리는 것이 어울리겠다고 판단, 이후 토키코 본인은 더이상 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 아키나에게 커버를 제안하여 발매된 싱글이다.] 원래 눈물이 많고, 노래를 '연기'하는데 탁월하다는 평을 받아왔던 아키나였지만, 이 노래를 음악 방송에서 라이브로 부를 때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개인적 상황[* [[콘도 마사히코]]와의 불안정한 관계, 여동생 [[나카모리 아키호|아키호]]의 누드집 발간 등을 포함한 가족 문제 등.]이 이 노래에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고 한다. 이 노래로 1987년 일본 레코드 대상 3연패도 점쳐졌으나, 아키나 본인이 이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실제 대상 수상은 콘도 마사히코[* 당시 레코드 대상을 수상한 싱글이 "愚か者" 라는 곡인데, 판매 실적도 21만장으로 난파선에 비해 1/2 정도였고, 오리콘 연간 차트 6위를 기록한 난파선에 비해서 연간 차트 35위권에 랭크된 곡으로 아무리 봐도 대상감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있다. 이때 콘도에게 '레코대(レコ大, 레코드대상) 사퇴를 하지 않으면 어머니의 유골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괴전화가 왔음에도 기어이 시상식에 참여하여 어머니의 유골은 끝끝내 되돌려받지 못했다.]가 수상했다.수상자 발표 당시 수상자 본인보다 더 활짝 웃으며 박수치는 아키나를 보면 당시 아키나가 마사히코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이후 "SAND BEIGE"를 잇는 아랍풍의 이국적인 싱글 "[[AL-MAUJ]]"와 발랄하고 경쾌하며 신기로운 편곡으로 브로드웨이 음악을 연상케하는 "[[TATTOO]]"로 15개 연속 싱글 1위를 기록하면서 전성기를 이어가게 된다. 이후 "[[I MISSED THE SHOCK]]"이 아쉽게 3위를 하며 연속 1위 기록은 깨졌지만 이 작품으로 싱글 총 판매량이 1000만 장을 돌파하였으며 다음 싱글 "[[LIAR]]"를 통해 1위를 되찾아오기도 했다. 원래대로라면 1989년 12월 15일에 1982년부터 1988년까지 발매된 미니 앨범 포함 모든 앨범이 GOLD CD 사양으로 3600엔에 판매 예정이었지만, 무산되었다. 이로 인해 아키나 커리어 40년 역사상 GOLD CD는 베스트 1, 2와 [[CRUISE]], 그리고 [[AKINA EAST LIVE INDEX-XXⅢ]]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